단토의 예술철학이 담긴 책 일상적인 변용(The transfiguration of the commonplace) 그 두 번째 시간이자 본문으로의 첫 번째 수업을 시작한다.
단토의 책은 비교적 쉽게 쓰여 있지만 그의 예술 철학에 대한 내용은 어려워 충분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의 사고 실험을 위한 가상의 미술관을 시작으로 J라는 가상의 인물이며 그의 미메시스 같은 존재를 등장시켜 질문과 설정을 이어간다.
붉은 사각형의 예술작품과 그냥 작업의 비교를 통해 눈에 보이는 세부적인 면에서 똑같이 닮은 대상이 배제되는 신분상의 부정의(rank injustice)에 대해 J는 의문을 제기한다.
붉은 사각형은 모두 (예술작품도 작업도) 비어있다. = literally empty
그러나 J의 작품(작업)은 (예술작품과 달리) 공허하다. = richness
(공허하다 즉, 서사가 비어있다로 해석해본다. empty)
공허하다(empty) p.70
- 서사적 풍부함이 없기에 공허하며, 인상적이 깊이가 없어서 공허하다.
단토에게 empty는 미적 판단에서의 empty라 할 수 있다. - 제목 (일반 사물과 예술작품에 타이틀이 붙는 이유)
제목은 해석을 위한 지침을 주거나 단서를 주며, 존재론적 위상을 준다.
그래서 empty하고 untitled 한 J의 작업이 한 일은, 예술과 단순한 사물들의 세계 사이에 경계선을 훼손시키고자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의도에 비해 이룬 것이 없다.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판이한 소속(하나는 예술, 하나는 사물)이 식별불가능한 상대역(counterparts)에 대한 구분은 설명될 수 없다. 아직은.
예술제도론(조지 디키)에 따라 제도적 틀에 따라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아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예술제도론도 식별불가능한 상대역에 있어서는 어떤 것은 예술작품으로 격상되게 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이는 단토의 메타철학과 상관이 있는데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잠시 데카르트를 빌려오자면, 데카르트의 철학은 메트릭스(영화)의 바탕이 된 걸로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걸 들으면 알려나
데카르트 방법론. 내가 믿을 수 밖에 없는 게 나타날 때까지 계속해서 의심해 나간다. 어떤 상황이건! 꿈이든 현실이든.. 확실한 게 하나 있다. 나는 생각하고 있다는 거다. 그 생각하고 있는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육체적 존재가 아니라 정신적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하는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확실한 것으로부터 추론해 나가면서 세상을 밝혀나가는 것.
이제 비트겐슈타인을 끌어오는데, 그의 규칙준수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오늘은 여기까지하고 수업을 마친다.
나머지는 이후의 간략 메모이니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플라톤과 셰익스피어
- 예술은 모방이다.
- 거울을 사용한다는 것은 우연적인 것일 뿐
- 사실 거울자체는 모방과 무방하다.
- 플라톤은 이미테이션, 미메시스 관점에서만 봤다면,
- 셰익스피어는 자연을 비추기도 하지만, 나 자신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매체라는 점을 지적했으며 햄릿에 연극 속 연극으로 깊게 반영되었다.
- 곤자고의 죽음(dean of Gonzago)을 통해 햄릿이 염두에 둔 것은 자기 인식의 양태로서 거울의 기능이다.
나 자신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매체
플라톤(부정한다)
- 시(예술)가 나쁜 건, 3중의 기소
- 예술은 이상적인 인간의 모방이며 불안정하다. 이데아의 세계에 있다.
- 바이올린의 (어피어런스) 외양에만 관심 있지 펑션에 관심 없고, 이데아에 대한 널리지도 없어서 두 단계 멀어져 있으니까
- 모방은 컴플릿할 수 없기 때문에 이데아로 갈 수 없다
아리스토 텔레스(모방을 긍정한다)
- 시학에서 모방에 대해 말하고 있음
- 시신을 봤을 때 디스거스트를 느끼지 않냐. 혐오 역겨움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시학 recognition(재인, 시학에서는 재인의 의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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